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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집에서

아이들과 남편이 금요일 아침 일본 여행을 떠났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남편이 모든 계획을 짜고, 셋이서 여행 일정과 환전, 가방 꾸리기까지 하더니 진짜 갔다. 애초에 아이들이랑 셋이서만 여행을 가라고 부추겼던 건 나였지만 이렇게 철저히 배제된 채 모든 일이 진행되니 참으로 시원하다. 8시 비행기라 집에서 5시에 출발했는데 가는 길에 수영장 앞에서 내려준 이후로 시간이 다른 차원으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모든 게 여유로웠다. 금요일이라 새벽 수영반 인원이 우리 라인에 5명뿐이었지만 뭔가 숨 가쁘지 않았다. 집에 올 때 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왔는데 버스 타고 와도 집까지 5분이면 도착했다. 집에 도착했는데 아직 6시 40분이었다. 빨래를 돌리고, 아이들이 몸만 빠져나간 ..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움직이기

화요일 저녁엔 기타 수업을 간다. 화요일마다 남편이 일찍 퇴근을 해서 아파트 장터에서 분식을 사 오는데, 어제 하필 떡볶이를 해 먹어서 그냥 오라고 했다. 간단하게 참치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남편이 아이들과 시끌벅적 저녁 먹는 중에 나는 기타를 오른쪽 어깨에 둘러메고 바람과 같이 집밖으로 나왔다. 일주일에 한 번 저녁 두 시간은 기타 수업이란 이름하에 자유가 허락된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기타지만 어깨가 전혀 무겁지 않은 것은 온전히 기분 탓이다.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내려오는데 위층부터 타고 왔는지 같은 라인에 사는 고등학생 아이들이 어느 한 층에 모두 내렸다. 평소에도 많은 아이들이 그 층에 자주 멈추는 것으로 봐서 공부방이 있는 듯했다. 한 손에는 핸드폰, 다른 손..

하늘이 뚫린 날

눈을 뜨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나 보다. 일어났을 땐 여덟 시 가까운 시각이었고, 밖엔 비가 오고 있었다. 어제도 비가 온다고 했는데 하늘에 구름이 좀 있었을 뿐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날씨였는데, 어제 올 비가 더해져서 오는지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이다. 너무 더웠던 8월,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비가 폭우일 줄은 몰랐다. 시간당 비가 120mm가 내렸다는 밤, 아이들과 남편은 할아버지 할머니댁에 여름맞이 놀러 간 날이어서 홀가분하게 잠을 잤다. 비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은 벌써 있었다. 전날 오후 몸이 찌뿌둥하여 수영장에 버스를 타고 갔는데, 아파트 코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데 우산이 몇 번이고 뒤집힐 위기였고, 몰아치는 비바람에 옷이 벌써 젖었으니까. 그래도 버스 ..

제주도 vs 거제도

원래 이번 여름휴가는 큰맘 먹고 이탈리아를 가려고 했었다. 1~2월에 남편이 나름대로 비행기값도 알아보고 예약 직전까지 갔었으니까. 나는 이탈리아, 남편은 스위스, 아이들은 프랑스를 가고 싶다고 해서 자주 가는 것도 아니므로 한번 가보자 으쌰으쌰 했었지만 3월 이란 미국 전쟁이 일어났다. 유가 불안에 비행기값은 천정부지 치솟고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했을 때는 처음 알던 표값에 1~200은 추가된 상황이었다. 유류할증료까지 하면 더 비쌀 것 같아 여름휴가는 잠정적으로 보류했다. 그다음 고민한 곳은 울릉도였다.대환장 기안장을 보기도 했고, 독도에 대한 일말의 의무감이 있어서 알아보았더니 일인당 50만 원이면 될 것 같아 괜찮다 싶었다. 섬에 살면서 섬으로 놀러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지, 아이들은 울릉도 대신..

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지난주 2년에 한 번씩 하는 국가건강검진을 받았다. 2년마다 돌아오는 숙제검사는 할 때마다 긴장된다. 그동안 건강하게 잘 썼는지, 운동을 게을리했는지, 몸에 나쁜 음식을 많이 먹었는지, 자라면 안 될 것들이 그 사이 자라진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보며 확인받는 검사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더 준비하게 된다. 2년 전엔 대장내시경과 위 내시경을 수면으로 받았기에 올해는 대장내시경을 건너뛰고 위내시경만 받기로 해서 조금은 부담이 덜했지만 일주일 전부터 좋아하는 믹스커피도 끊고, 달달한 과자나 밀가루 많이 들어간 음식도 적당히 줄여가며 나름대로 몸 관리를 했다. 마흔 언저리에 걸친 나이라 아직은 젊다고 스스로 염불 외듯 생각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또 나이라 그런지 전에는 저녁 식사 몇 번 건너 띄면 1~2..

가벼운 것은 가볍게

마르고 따스한 등을 쓰다듬으며떠나보낼 것을 생각한다 가벼운 것은 가벼이 날려 보내면 된다무거운 것은 가라앉을 때 까지 기다린다소란한 것은 시끄러운 마음부터 들여다본다고요한 것은 조용히 단단해 지는 중이라 믿는다 성급한 것은 밭은 숨 한번 내쉰다상처받은 것은 다 나을때까지 되새기지 않는다 화나는 것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한다 가벼운 것은 가볍게 그렇게 놔두다보면 말랑하고 가녀린 등은 어느새 단단하고 반듯하게 자라있겠지내민 손 쑥스러워 쓰다듬기도 힘든 때가 오면마음 놓고 등을 맡기던 어린 날을 꺼내보겠지 지난 주말 편한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했는데, 뜻밖에 불편한 시간을 견디어야 했던 일이 떠올라 글을 쓴다.아들이 남편에게 예의없게 대한 것을 호되게 꾸짖었는데,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 아이 역성을 들게 된 것이 ..

알아서 잘 자란다

아이들이 가고 난 후 교실에 새로 온 개운죽 화분에 물을 더 줬다. 아까 넣어두었던 개구리알(수정토)이 이미 물을 잔뜩 머금어 부풀어있고 물이 적어 보였다. 그 결에 하나하나 아이들이 만든 화분을 둘러보았다. 만들 때 그렇게 소란스럽더니 플라스틱 화분마다 화려한 무늬들이 가득하다. 화분에 담긴 가는 손가락 굵기의 키 작은 개운죽이 컵 안에 자리를 못 잡고 아직은 둥실 떠있다. 뿌리가 너무 얇고 가늘어, 또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은 개운죽이 언제 자랄까 싶지만, 이 아이는 굉장히 생명력이 강하다. 집에 있는 개운죽은 벌써 5~6년 전에 학교에서 만들어 집에 데려온 놈인데 아직도 펄펄하다. 물론 개운죽은 식물 특성상 굵게 자라거나 길이가 길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꼬박꼬박 물을 갈아주고 햇빛 덜한..

자리 바꾸기는 어려워

매월 첫날은 자리를 바꾼다. 교실 안에서 어디에 앉을까 아이들에게는 굉장한 관심사다. 매월 첫날 빅이벤트를 앞두고 나도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얘가 쟤랑 짝이 되면 잘 지낼 수 있을까?-얘가 앞으로 오면 더 시끄러워지는 것은 아닐까?-얘랑 쟤가 짝이 된 적이 있었나? 같은 모둠인 적은 있었나? 22개의 아이들 자리를 놔두고 이름을 썼다가 지웠다가 옮겼다가 다시 되돌렸다가 반복한 후 최종의 최최종까지 파일을 만들었다. 1교시 수업 내용을 간단히 마치고 자리 바꾼다고 하니 우르르 짐 정리를 시작한다.평소 꾸물대는 아이들도 서랍에 뭉쳐있는 학습지를 꺼내 정리하고, 책상이 광이 나게 닦는다. 대강 청소하고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자리를 알려준다. 아이들은 이것이 랜덤인 줄 알고, 나도 처음에 공지할 때 그렇게..

친절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사회 2단원을 재미있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수업 한 시간 전, 아이들 체육 하러 간 사이 게임 카드를 만들었다. 요즘따라 컨디션이 안 좋은 여학생이 보건실에 갔다가 퇴짜를 맞고(너무 자주 온다는 이유 더하기 교실에서 약 먹고 쉬라는 권고) 교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같이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컬러로 인쇄한 카드 인쇄물을 자르고, 아이는 반절 접어서 풀로 붙이는 일이었다. 숫자가 좀 되는지라 꼭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아이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하다 보니 30분 만에 다 해치웠다. 아이도 아까의 힘없는 얼굴에서 생기 넘치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하는가 싶었다. 운동장에 갔던 아이들이 속속 교실로 돌아오고 조용했던 교실이 다시 활력 가득, 소음 가득 공간으로 변했다..

붙드는 힘

붙드는 힘, 꼭 잡고 놓지 않는 힘이 간절하다끈기나 인내라는 짧은 낱말에는 절박함이 없다붙들고 놓지 않는다는 말은 뎅강 끊어지지 않는다손아귀에 남아 있는 한 톨의 힘마저 모아 살아나게 한다 놓지 마라그렇게 쉬이 버리지 마라그만두지 마라해볼 때까지 끝까지 해보고 난 후그때 그만두어도 늦지 않다다 털어버리고 텅 비어버렸다 아쉬워하지 마라다시 새롭게 채워질 자리를 마련한 것일 뿐무서워하지 말고 끝까지 붙들어라 붙들고 있는 손이 미끄러지고 손톱이 쥔 주먹 속으로 파고들어 놓고 싶어 헐떡일 때 엿볼 수 있는 너머넘어가 본 사람만이 알게 된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이제 좀 쉬고 싶을 때이 정도면 되지 않나 싶을 때그런 때엔 넘어가지 못한 때 붙들고 잡아 늘어뜨린 후 넘어가 보라그곳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떠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