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나 혼자 있다

우리집 냉장고엔 오래된 상자가 하나 있다

다시봉봉 2024. 2.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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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조용히 내리는 일요일 저녁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외식한다고 밖에 나가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 가서 책도 보고 온다고 했으니 아직 들어오려면 조금 있어야 할 것 같아 나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지난번에 시킨 마라탕이 남아있어 밥을 데워 먹었다. 국 속에 건더기가 많아 반찬은 딱히 필요하지 않았고 밥 먹으면서 볼 유튜브를 켰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상단에 있길래 무심코 눌렀다. 제목이 콩국수엔 슬픈 전설이 하나 있어....

 

예전에 하이킥 볼 때는 황정음이랑 신세경 보는 맛에 봤었는데 오분순삭으로 나오는 에피들을 하나둘씩 다시 보면서 그 외 주변 인물들의 서사도 꽤나 재미있었다. 현경의 아버지(이순재)가 재혼 상대인 교감선생님(고 김자옥 배우)과 다툼으로 아프게 된다. 현경은 세경에게 콩국수를 만들라고 했는데 세경이 맷돌로 콩국수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린다. 큰 수술을 하기 전 엄마가 해주신 음식이 콩국수였는데 결국 콩국수가 엄마가 해주신 마지막 음식이었다는 이야기다.

 

출처 - 유튜브 하이킥 오분순삭 중

극 중 아픈 몸으로 맷돌로 콩을 가는 엄마를 타박하는 현경의 말에 엄마의 말이 선명하다.

병원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그런가 이상하게 하나도 안 아프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병원에서 하루종일 항암 주사를 맞고 집에 오면 그날 저녁은 꼼짝 못 하고 누워만 계시다가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쉬지 않고 집안일 바깥일을 하셨다. 좀 쉬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이젠 괜찮다고 이렇게 돌아다녀야 오히려 더 힘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결혼하던 해엔 농사일도 제대로 못할 만큼 많이 쇠약해지셨는데도 그 너른 밭에 메밀을 심었다. 또 메밀 하얀 꽃이 해사하던 밭 옆엔 작은 닭장을 만들었다. 메밀과 닭은 메밀묵과 백숙으로 결혼식 전날 집에서 있었던 잔치에 잘 썼다.

닭장은 아빠가 손수 만들었는데 배추나 무 같은 채소를 던져줘도 잘 먹는 오골계들이었다. 병아리 때부터 들여와서 잔치 후에도 여전히 닭장에 몇 마리가 남아 아침마다 달걀을 낳았다. 달걀 특유의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그 달걀들로 만든 음식들을 잘 먹지 않았다. 양계장에서 온갖 살충제를 뒤집어쓴 달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건강했을 텐데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 후 엄마를 보러 집에 주말마다 갔었다. 엄마는 갈 때마다 더 마르고 힘이 빠지셨었다.

집으로 가는 길엔 엄마가 그리웠고, 다시 거제로 내려오는 길엔 가슴이 아파 고속도로 위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엄마는 아픈 몸으로도 거제로 내려가는 나에게 이런저런 먹거리를 챙겨주었다. 밭에서 바로 딴 채소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은 조그만 파란 상자 하나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날 아침 닭장에서 꺼낸 달걀이라고 했다.

결혼 초라 겨우 자신감 있게 할 수 있는 요리는 계란말이였는데 반찬으로 잘 쓰겠다 생각하여 나는 먹지 않더라도 챙겨 왔다. 집에서 그 상자를 열었을 땐 눈물이 터졌다.

 

작은 달걀 하나하나가 깨질까 봐 휴지에 쌓여있었다. 차 타고 내려가는 동안 혹시나 깨질까 싶어 엄마가 한 개 한개 손수 싼 거였다. 아픈 몸으로 집에서 꽤 멀리 있는 닭장까지 가서 달걀을 꺼내 와 그것을 깨끗하게 닦아 상자에 쌓는 동안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달걀 하나라도 들려 보내고 싶은 그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쓰러워 달걀 상자를 보고 울어버렸다.

 

지금도 그 상자는 우리 집 냉장고 안에 있다. 몇 번의 이사에도 상자를 버릴 수 없었다.

이미 달걀은 모두 메말라 건들면 파사삭 바스러질 것 같지만
냉장고 깊숙이 자리 잡은 상자는
이제는 나만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손길이다.

 

그해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외로운 날이면, 기쁜 날이면, 슬픈 날이면, 언제나 언제나 생각난다. 

 

우리 집 냉장고 속 오래된 상자 하나.

그 상자는 내가 엄마 생각을 해도 슬프지 않을  때 그때쯤이면 치우게 될까.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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