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나 혼자 있다

열매 세 알

다시봉봉 2024. 12. 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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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끝

나무 끝 달린 열매 세 알

그 안에 담긴 세 계절

손바닥 위에 두었더니

내내 따뜻하다.

11월은 주말마다 행사가 있어서 바빴지만 이번 주말은 남편은 김장을 하러 혼자 시댁에 가는 덕분에 여유 있었다. 주말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여전해서 쉬는 중간중간마다 빨래를 돌리고 옷가지를 정리하느라 분주하긴 해도 홀가분한 것은 사실이다. 아이들과 토요일 오전에 도서관에 갔다. 매일 차를 타고 가는 길을 처음으로 걸어가 보았다. 집에서 차 타고 5분이면 금세 도착했던 곳이 내리막길, 골목길, 횡단보도, 은행나무, 상점가에 운동장을 돌아서 오르막길을 지나서야 도착했다. 헥헥 대며 도착하니 말없이 책 몇 권을 고르더니 저마다 좋아하는 자리에 앉는다. 한 시간가량 잔잔한 시간이 찾아왔고, 가끔 아이들이 앉은자리를 힐끔 보는 것으로 엄마 역할 조금, 나는 내 시간이 흡족했다.

 

도서관에서 제일 좋아하는 자리는 창가 옆에 다리를 길게 뻗을 수 있는 좌식 소파가 있는 곳이다.

아기들이 종종 찾는 곳이라 자석 블록도 있고, 각종 사운드북이랑 유아용 도서가 빼곡하다. 어떤 아기 엄마가 이제 돌을 갓 넘겼을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아기를 물끄러미 보니 아이가 나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 왔다.

입모양으로 "안녕?" 하니까 아기가 동그란 엉덩이를 방실방실 띄우며 박수를 쳤다. 아기 엄마가 아기를 안고 갔는데도 발치에 있던 아기와 이따금 눈이 마주쳤다.  코에 닿진 않았지만 분명히 맴돌았을 아기 냄새를 찾고 있는데 우리 둘째가 내 곁에 왔다.

 

-배고파!

아침을 대충 먹는가 싶더니 이른 점심이었는데도 허기진 모양이길래 챙겨서 나왔다.

남의 집 아기가 아무리 예뻐도 우리 아이 배고픈 것보다 중하진 않으니까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서관 올 때는 늦은 가을만큼 천천히 걸었는데, 집에 갈 때는 시장기를 참을 수 없는 아이들 덕분에 도서관 아래에 있는 편의점으로 최고 속도로 진입했다.

 

차가운 삼각김밥 하나론 부족한지 작은 컵라면까지 하나씩 척척 들고 온다. 아직 삼각김밥 비닐을 잘 뜯지 못하는 두 녀석이 소중한 삼각김밥을 조심스레 건네길래 찬찬히 껍질을 벗겨줬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몸짓은 밥알에 집중하고, 면발에 고정되어 조용해졌다.

 

고요함은 잠시, 다시 편의점이 분주해졌다. 서너 명의 남학생들이 들어오고 이윽고 여자 아이들도 들어왔다. 일행인듯한 아이들은 우리가 앉은 테이블 옆에 앉아 저희들끼리만 알 수 있는 대화를 나누더니 마찬가지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들고 왔다. 익숙한 듯 라면 비닐을 열고, 컵라면에 물을 따르는 모습이 아마 몇 년 후에 우리 아이들 모습 같아 눈길이 갔다.

 

도서관의 아기와

편의점의 중학생

그리고 그 사이의 우리 아이들.

 

모두 다른 아이들이었지만 편의점에서 본 아이들 곁엔 부모가 없었다. 그 나잇대 아이 곁에 부모 대신 친구들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이제 곧 우리 아이들 곁에도 내가 있을 자리는 없을 거란 확실한 미래가 쓸쓸했다.

 

같이 도서관에 가고, 산책을 하고, 주말이면 여행을 가고, 같이 있는 것이 너무 당연했던 과거와 지금의 모습에서 조금씩 부모의 자리가 줄어들 다가올 미래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함께 걸을 수 있길 바랐던 아기였던 때

짧은 다리로 분주히 다니면서도 어딜 가든 꼭 손을 잡고 다녔던 때를 지나

문구점, 편의점이든 목적지가 분명하여 엄마보다 더 빨리 가면서도 혼자 가기는 주저해 한참 가다가도 돌아보는 지금.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들이지만 분명 그 끝이 보이는 지금이 아쉽고 허전하여 산책길이 더디어졌다.

초록이던 길이 붉고 노랗더니 이제 떨어진 낙엽이 더 많아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허전함을 메워주었다.

 

붉은 산수유 열매가 보여 몇 알을 따서 아이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탐스런 열매의 빛깔 덕분인지,  맞잡은 아이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서인지

썰렁한 손바닥이 덩달아 따끈해진 것 같았다.

 

가을 끝

나무 끝 달린 열매 세 알

그 안에 담긴 세 계절

손바닥 위에 두었더니

내내 따뜻하다.

아.

따뜻한 건 열매가 아니라

네 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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