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나 혼자 있다

상자 안에 담은 봄

다시봉봉 2023. 4. 9.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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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준비하고 있는데 시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바쁘나?
-예. 이제 출근하려구요.
-오늘 택배 갈껀데 파김치 들어있다. 경비실에 맡기라고 할까?
-아니요. 저희 동네 택배 늘 오후에 도착해서 퇴근하고 바로 정리하면 될거예요.
-그래. 아침에 바쁠텐데 출근해라.
-예. 어머님! 오후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니 문 앞에 과일 상자 하나가 있었다. 낑낑 거리면서 상자를 옮기고 열어보니 15키로 짜리 택배 상자가 화수분이다. 꺼내도 꺼내도 뭐가 계속 나온다. 파김치 담은 커다란 비닐 봉투부터 달래, 시금치, 대파, 참외 대여섯알. 쌈배추까지 켜켜이 참 알뜰하게도 담으셨다. 파김치는 김치통에 옮겨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거두고 채소들은 한번에 먹을만큼 나눠서 비닐팩에 넣었다. 한동안 채소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어머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래. 택배 왔드나?
-예. 파김치랑 많이 보내주셨더라구요. 감사합니다. 
-그래. 파김치 맛들었을거니께 김치냉장고에 넣고 먹어라.
-예. 어머님. 잘 먹겠습니다. 
 
택배 보내는 사람의 수고로움은 경험한 사람만 안다. 보내서 받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했을 때 이것들이 상하지 않고 잘 도착할 것인지부터 좀 더 싱싱한 것으로 보기좋게 담아 받는 사람이 기분 좋게 받았으면 하는 마음. 제일 맛있을 때 같이 먹고 싶고 잘 먹었으면 하는 마음. 택배 기사를 부르거나 아니면 택배 회사 지점에 가서 송장을 붙이는 과정. 택배비를 지불하고 그 이후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을 때까지의 은근히 신경쓰이는 것까지. 봄 바람을 맞고 자란 싱싱한 나물들을 언제나 제철에 보내주시는 어머님의 정성과 고생을 다 알지는 못해도 나같으면 그렇게 챙기진 못할 것 같다는 것은 안다.
 
제철 나물들을 잔뜩 보내주셨는데 이날은 상자 정리만해도 고단하여 해먹지 못하고 주말에 나물을 무쳤다.
 
들기름 넣고 고소하게 시금치를 무치고
달래는 뿌리 하나하나 살려 깨끗하게 씻어서 새콤 달콤하게 무치고
봄대파는 보드랍고 아삭해서 김을 조금 넣고 짭쪼롬하게 무쳤다.
시래기는 시래기 많이 넣고 무랑 된장 넣고 구수하게 끓였다.
 
애들 입맛엔 조금 어려울 것 같기도 해서 햄도 잘게 잘라서 볶고 계란도 부쳤다. 비빔밥에 김가루는 덤이다.
 
식탁이 초록이다.
내가 받은 것이 택배 상자가 아니라 봄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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