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
바다 소풍, 안과 진료, 빗속 전력질주 후 교통사고, 어린이날 준비?
하루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났다면?
보통날보다 훨씬 긴 하루였을 것이다.
첫 번째 장소는 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목요일 아침이었다. 아! 한 가지 달랐던 것은 개교기념일이라 하루 집에서 아이들과 쉴 수 있었다는 것! 아이 아빠는 근로자의 날이라도 출근을 해야 해서 눈을 떴을 땐 이미 8시 넘은 시각이었다. 어제 일찍 잠에 들었는데도, 늦잠을 잤지만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아이들 아침을 주고, 오늘은 미뤄놨던 둘째 안과 진료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급격하게 시력이 안 좋아진 둘째가 지난번에 이어 진료를 보고 드림렌즈 착용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과에 전화를 해보니, 오늘 예약이 많아 오후에나 진료가 가능하다고 해서 3시로 예약을 잡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오전에 여유가 생겨서 아이들과 바다에 가기로 했다.





거제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은 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10분 거리의 바다를 마음껏 갈 수 있다는 것이겠다.
점심은 바다 바로 옆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기로 하고, 간단하게 돗자리, 물만 챙겨서 바로 움직였다.
날씨가 흐리긴 해도 기온 20도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바다에 도착하자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기온이 높아도 바람이 불면 금방 추워지는데, 돗자리를 펴자마자 우리 모두 덜덜 떨었다. 다행인지 게으름인지 세탁소에 맡기려고 챙겨두었던 겨울 옷들이 차에 있어 대충 걸쳐 입고, 또 웬일로 침낭까지 돌돌 말려 있어서 바로 폈다. 모래가 발가락에 성기는 것을 세상 싫어하는 딸은 자기 좋아하는 책 읽으면서 돗자리에서 혼자 있고, 나랑 아들만 모래사장으로 내려갔다. 아무리 시야가 확 트이고, 파도 소리 좋고, 발가락 사이사이 삐져나오는 감촉 좋은 모래라도 적응 안 되는 것은 바다 냄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금세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랑 쉴 새 없이 팠던 모래 구덩이 덕분이다.
모래도 밟고, 모래도 파고, 모래에 파묻히다가 여름인 줄 알았던 날씨가 겨울로 바뀔 만큼 추워서 다시 돗자리로 돌아왔다. 집나 갔던 허기도 어느새 들어와 컵라면 한 그릇씩 먹고 집에 돌아왔다.
별로 치울 것도 없어 옷만 갈아입고 눈을 잠시 붙였는데, 어느덧 안과 예약 시간이 다가왔다.
두 번째 장소! 안과.
집에서 나올 때 하늘이 아까보다 더 꾸물거리긴 했다. 그래도 뭐 간간이 햇살도 비치길래 비가 오겠어? 싶었는데 병원에 가까워오자 창문에 한두 방울 떨어지고, 주차하고 병원으로 잠깐 걷는 그 길엔 사람들 대부분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병원까지 별로 먼 거리도 아니어서 별거 있겠어하는 마음으로 안과에 갔다.
근로자의 날이라 부모님들이 예약을 많이 했는지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북적였다.
사실 처음 아이 시력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서운을 넘어 분개했었다.
아이 시력이 안 좋아진 것이 내 탓인 양 말하는 남편이 서운하기도 했고, 상황이 이해가 안 가기도 했었다.
우리 아이가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티브이를 많이 보는 것도 아니고, 학교 끝나고 만화책을 좀 보는 것뿐인데 시력이 그렇게 떨어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내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누워서 책 보는 것인데, 그걸 아이랑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속상했던 것 같다. 아무튼 병원에 온 이상 오늘은 렌즈 착용을 확실시해야 했다. 시력은 지난번에서 더 나아진 것 없었다. 아이 이름을 부르면, 시력 검사를 하고, 또 아이 이름을 부르면 진료실로 가서 다시 검사, 그랬다가 상담실에 가서 드림렌즈 가격 설명 듣고, 렌즈실로 가서 시착용해 보는 과정을 정신없이 수행하고 나니 내 손엔 아이 100만 원에 달하는 렌즈가 세척액, 보관액, 식염수, 인공눈물과 함께 가방에 들려 있었다.(물론 일주일 체험용 렌즈, 아직 결제는 안 했음)
잘 때 렌즈를 끼고 자면 다음날 시력이 좋아진다는 그 마법의 렌즈를 들고 밖을 나섰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병원 문을 열 수가 없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근처에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아 아이 손을 잡고 무작정 달려야 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안과라서 별의별 가게는 즐비한데 정작 급한 편의점은 안 보였다. 빗속을 아이와 달리는데, 한쪽 손엔 아이 손, 다른 손엔 렌즈 가방을 들고 정신없이 뛰었다. 오전에 느꼈던 바람에 비가 더해지니 오한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나보다 눈썰미가 좋은 아이가 근처에 아트박스를 발견해서 작은 우산 하나를 사서 천천히 걸었다.
옷이 젖으니 마음도 젖는가. 우산을 들고 가는데 빨리 따뜻한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서둘러 집으로 가고 싶은데 비는 더욱 쏟아부었다. 여름에도 이렇게 오면 혀를 내두를 급작스런 폭우였다. 주차장에서 나와 우회전을 하면 큰 사거리가 나와서 잠시 대기를 하고 있었다. 우회전을 해서 들어가기엔 차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고 비가 내려 시야도 확보가 어려웠다. 천천히 들어가려고 일단 멈춘 상태였다. 이제 들어갈까 싶어 움직이는 찰나 뒤에서 뻑! 소리가 났다.
세 번째 장소! 교통사고 후 거리.
퍽! 소리가 났을 때 살짝 분간이 안되었다. 빗소리에 섞여 이게 빗소리인지, 바닥과 바퀴의 마찰음인지, 뒤에서 진짜 들이받은 것인지 긴가민가 했다. 사고 장소가 교차로 하나의 횡단보도가 끝나고 이어진 횡단보도 사이였기에 조금 차를 이동시켜야 했다.
아이는 그냥 가라고 성화고, 나는 확인을 해야 한다면서 차에서 내렸다. 뒤 범퍼를 만져보니 확실히 움푹 파였고, 도장이 벗겨졌고 실금이 여러 개 난 것이 보였다.
사고 차량 차주도 뒤에 정차를 하고 내렸다.
-제가 부딪친 거 맞죠?
첫마디가 그랬다. 뭔가 사과를 기대하기에도 너무 경황이 없었고, 비는 쏟아져 내렸다. 차들은 경적을 울리면서 지나가고, 상대방의 말은 빗속에 흡수되어 전달이 안되었다. 상대편 차주가 와서 내 차를 훑어보더니 한마디 또 한다.
-근데 사고 위치가 제 차는 낮아서 제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잉? 이건 뭐지? 정신을 차리고 빗속에 서 있는 그분과 내 사이에 쏟아지는 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 의심도 있었나 보다.
-저희 차엔 이런 자국 하나도 없었어요. 방금 부딪쳐서 생긴 것 맞아요. 보험사에 사고 접수하시죠.
그렇게 쿨하게 말은 해놓고 차에 들어와서는 보험사 전화번호도 몰라서 허둥지둥 남편한테 급하게 전화해 물어봤다. 남편도 엉뚱한 번호를 알려줘서 다시 검색해서 사고 접수를 했다. 자동차 보험은 매년 남편이 들고 있어서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참에 보험사가 삼성화재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다행일까?

전화를 하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아이를 그제야 돌아봤다. 아무리 가벼운 접촉사고라고 해도 뒷좌석에 앉아있던 아이가 앞 좌석인 나보다는 더 충격이 있었을 텐데 아프진 않은지, 괜찮은지 바로 묻지도 않았다.
괜찮은지 묻는 엄마 모습이 더 안 괜찮아 보였는지, 안과에선 그렇게 꼬물꼬물 장난만 치던 아이도 상황 파악을 하고 얌전히 있었다.
다행히 보험사 직원분이 거의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오셔서 나는 차에 있고 다 처리를 해주셨다. 우리 차 블랙박스가 딱 사고 장면만 나오지 않았는데, 상대편 차 블랙박스에 사고 장면이 찍혔다고 한다. 멈춰있는 차를 들이받은 거라서 100% 상대 과실이다 이렇게 말은 안 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하니 안심이었다.
일단 집에 가도 된다는 말을 듣고 출발하려는데, 상대편 차가 먼저 출발해서 가버렸다.
뭔가 들어야할도 있었던 것 같고 내가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찜찜했다.
가는 길에 다시 아이의 상태를 물어봤다.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나 역시 그렇지만 평소 카시트를 잘 착용하고, 안전띠를 생활화한 덕분에, 또 급하게 운전하지 않은 덕분에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거였지 하마터면 큰일이 될 뻔했다.
아이에게 새삼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엄마가 아까 보험 접수한다고 바빠서 우리 아들 괜찮은지 제일 먼저 물어봐야 하는데 그걸 못했네. 미안해.
-괜찮아! 엄마. 엄마는 괜찮아?
-응. 엄마는 괜찮지! 뒷자리에 앉은 네가 더 위험했지. 엄마가 너부터 챙겨야 하는데. 미안해.
상대편 차주한테 못 들은 말.
괜찮으세요? 미안합니다.
나도 그쪽에게 묻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 말을 못 했다.
뭔가 불안하고 찜찜한 상태로 집에 왔는데, 오전의 피곤부터 사고 후 여파까지 한 번에 몰려왔는지 급격하게 피곤했다. 저녁을 먹고 누워 있는데 문득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일은 어린이날 전 마지막 등교일이다. 아이들에게 선물로 줄 키링을 하나도 못 만들었다.
간식 선물도 있는데 굳이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첫 1학년 기념 어린이날 선물인데 내 손으로 만들어줘야지 하는 마음을 버리지는 못했다. 눈이 감기고, 손이 뻑뻑해도 손에 이미 익은 일이라 금방 만들었다.
모두 다 하고 나니 오늘 나의 하루가 참 길다.
길고 긴 하루 끝 다디단 잠으로 어서 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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