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쁜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
방학의 그 여유와 종업의 아쉬움은 어디로 가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새 학기를 준비하며 2월의 남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새 학기 맞이 마지막날에 드디어 반편성 자료를 받았다. 한 반 한 반 이름을 확인하고, 쌍둥이와 벌써부터 반을 달리해달라는 학부모들의 민원까지 반영된 반편성을 마친 후 이름표 작성까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더구나 조마조마하던 입학식도 계획과 식장 준비도 손댈 것 없이 잘 준비해 주셔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1학기 학습준비물 논의를 서둘러 마치자 4시 반 퇴근 시간이 어느덧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도 남은 시간은 교실 정리를 할 수 있겠다 했는데 다시 호출이었다.
-선생님, 쌍둥이가 또 있어요.
엥? 교무실에서 전달받은 파일에는 쌍둥이는 한 팀(?)뿐이라 같은 반으로 편성을 했는데 취학통지서 뒤에 있던 기초조사서 한 귀퉁이에 쌍둥이인 경우 같은 반으로 편성 바란다는 쌍둥이가 한 팀 더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확인해 보니 기초조사서에 쌍둥이인 학생 이름도 쓰여있지 않아서 주소 확인해 보고 겨우 찾았다.
쌍둥이 같은 반으로 넣으려니 학생수가 많아 한명씩 바꾸고, 그러려니 만들어 둔 반편성 엑셀 파일과 이름표 작업도 다시 해야 했다. 가까스로 끝냈다 생각했는데 다시 수정해야 하니 조금은 힘이 빠졌지만 나 혼자였다면 벙쪘을 일도 경력 많은 선생님들이 옆에서 괜찮다 괜찮다 하시니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기초조사서를 다시 보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입학식날 발견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한참 이름표를 자르고 넣고 하는데 숙직 주사님이 오셨다.
-6시까지는 모두 마치고 나가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는 학교 불이 7시 넘게 켜 있어서 늦더라도 교실 정리를 하고 가려고 했는데 일이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숙직 주사님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주사님께서 취향이 참 클래식하시더라고요. 숙직실 앞에는 좋은 음악이 항상 흘러나와요.
-맞아요! 주차장에서 나올 때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아침에 만나면 참 밝게 인사도 해주시고요.
-그런데 저는 좀 다른 면도 본 적 있어요. 한 번은 토요일에 학교에서 아이들 컴퓨터 행사가 있었거든요. 그때 저희 딸이 참가를 해서 그 겸에 저도 학교에 와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주말에 학교 문이 열려서 따로 말씀드리지 않을까 하다가 말씀드렸더니, 주말에 쉬지도 못한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셔서 좀 죄송했어요.
사실 그때 죄송한 것도 있었지만 무안했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6시 전에 끝내 달라는 말을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른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누구나 다크한 면은 있잖아요? 주사님한테는 주말에 학교 지키시면서 좀 쉬셔야 하는데 학생들이 드나드는 것도 모자라 선생님들까지 들락날락거리면 문 열고 닫고 신경 쓰실 일이 많으셔서 그랬을 거예요.
맞다. 짧은 생각으로 학교가 열린 김에 일이나 하자는 나의 편한 생각이었고, 일일이 문을 여닫고 학교를 둘러봐야 하는 주사님께는 번거롭고 귀찮을 일이었을 것이다. 생각이 짧았었다. 이렇듯 한 치 앞의 자기 이익만 생각하게 된다. 그걸 그땐 무안하다고 맘에 담아 두고 있기까지 하다니.. 참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다.
누구나 다크한 면은 있다.
웃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한 내가,
도레미파솔!! 항상 솔음으로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상냥한 내가,
유일하게 다크한 장소가 바로 집이니 말이다.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오전에 나갔다. 첫째 안경 수리 겸 둘째 시력 검사를 하러 안경점에도 가고 자기들끼리 놀러 온다기에 밀린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나둘 해치웠다. 겨우 한숨 돌리려고 일어나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들어왔다. 뭔가 쭈뼛쭈뼛 거리며 알은체를 안 하기에 왜 그런가 싶었다.
남편이 말했다.
-너희들 엄마한테 안경점에 다녀온 이야기 해야지?
-아.... 그게....
딸이 머뭇거리며 말을 빙빙 돌리기에 또 시력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다.
첫째가 작년 여름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고, 그 이후 둘째도 조금씩 멀리 있는 것은 안 보인다는 말을 하던 차였다. 남편은 아이들이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보지 말라고 하고, 항상 어디든 불을 환하게 켜 놓는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핸드폰으로 유튜브나 게임을 하지 않고, 집에서 티비도 많아야 1시간 정도 본다.
유일한 낙이 만화책이다.
도서관을 어릴 때부터 같이 자주 갔다. 그림책보단 학습만화에 눈을 떴고, 만화책 한 두 권이면 서로 돌려보고 아껴보고 하면서 조용히 잘 읽는다.
만화책만 보는 것이 조금 걸려 이런저런 글밥책도 많이 추천하지만 일단 자기들 취향이 확고해서 영 떨떠름해한다. 나는 소설이나 경제 관련 서적, 요즘은 건강 관련 책도 재밌다. 아이들이랑 그렇게 책 보는 것이 나의 낙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말을 안 하자 남편이 말을 잇는다.
-만화책 보기가 시력에 그렇게 안 좋대. 아빠가 만화책 적당히 보라고 했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작은 글자에 현란한 색감의 만화책을 눈앞에 가까이 두고 보는 것이 뭐 그렇게 눈에 좋겠는가. 그래도 눈 영양제에 아침저녁으로 블루베리 챙겨주는 내가 듣기엔 책 보는 아이들 타박하는 것으로 들렸다. 만화책이든 그냥 책이든 뭐든 적당한 것 누가 모를까? 그런데 경험한 사람만 아는 재미!
만화책을 쌓아두고 한 권 두 권 해치우는 재미. 한번 보고 두 번 봐도 감동인 부분은 눈물 주르륵, 웃긴 장면은 외울 때까지 본다. 책도 그렇다. 머리는 아직 스토리 분석 중인데 눈은 벌써 뒷장까지 마중을 나가버려 후다닥 읽어야 더 스토리가 살아 움직이고 재미있다. 재밌는 걸 어떡하나.
만화책을 적당히 보고, 시력을 위해 멀리 보기 운동을 하라는 말 좋은 말인 것 나도, 아이들도 안다.
그런데 남편의 말이 왜 그렇게 가시처럼 거슬렸는지 나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그래! 너희들 만화책 그만 봐! 책도 그만 보고! 눈이 소중하지 책은 안 봐도 돼! 도서관도 이제 엄마랑 안 가고 돼!
누구나 다크한 면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시력 안 좋은 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왜곡되고 편집되어 들리는 것이다. 남편의 의도가 아이들 눈 건강 때문인지, 진짜 나를 향한 말인지는 진의가 뭐든, 나에겐 그렇게 들렸다.
혼자 먹구름이 엄마를 피해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티비를 보다가 또 소파에서 만화를 보고 있다. 나도 청소를 우당탕탕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 어두컴컴하게 조명 하나만 켜고 묵혀둔 책을 굳이 봤다.
다크하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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