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나 혼자 있다

미루면 안 되는 것들

다시봉봉 2025. 1. 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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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나니 벌써 점심때가 다가온다. 한두 끼 안 먹어도 상관없고, 과자나 빵으로 때워도 되지만 나이가 엔간히 먹고서는 그것도 주저하게 된다.

아침으로 야채계란토스트를 해 먹었다. 양배추, 당근, 청양고추 채 썬 것을 계란 두 알에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노릇하게 구워 빵에 끼워 먹었다. 만드는 것은 간단하지만 사용한 주방 도구는 꽤 많다. 미뤄두자니 어제 먹었던 라면 냄비, 접시, 주걱 등이 싱크대에 벌써 솔찬했다.

할까 말까? 그럴 때 해야 하는데 잠시 미룬다.

그러면서 미루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는 게 얼마나 모순인가.

 

새해가 되어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매해 새해가 되면 올해 꼭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그렇지만 올해는 달랐다. 작년 말 비상계엄과 항공기 사고 등 우리나라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렸었다.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대통령이 국가를 내란 사태에 집어넣고 자신은 법 위에 군림하고 법을 피해 도망 다니는 모습에서 도덕과 책임의 기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무안공항에서 일어난 여객기 추락 사고는 또다시 이태원과 세월호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자들의 공포와 남은 가족들의 고통을 화면으로 목도하며 나 스스로가 거대한 삶 속에 짓눌려 꺼져가는 미미한 생명체임을 여실히 느껴야 했다. 죽음의 무차별적 공격에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고 계획할 수 있다고 얼마나 오만하게 생각했는지 모골이 송연하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 시간이었다.

이번에 내가 아니었다고 다음에도 그러리란 확신이 안 생기는, 이 나라가 어디서부터 변질되고 바스러져 무너져 가는지, 언제까지 그럴 것인지 감이 안 잡히고 불안감만 솟아오르던 차에 새해, 을사년이 된 것이다.

 

겨울방학이라 아이들과 부대끼는 시간이 많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방과후학교도 가고, 돌봄 교실도 가면서 오전은 바쁘게 지내는데 엄마는 손에 핸드폰만 잡고 어수선한 시국 상황에 불안해하고만 있다. 그렇게 불안해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질 리도 없는 데 말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몇 시간 동안 그동안 미루었던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어 시작했다.

 

까먹기 않기 위해 메모장에 기록해 놓았다.

1. 냉장고 청소

2. 신발장 정리

3. 가계부 정리

4. 안 쓰는 물건 정리

5. 싱크대 수납장 정리

6. 연금 계좌 정리하기 등

순서 따지지 않고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곳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쓰지 않는 반찬통과 아이들 어릴 때 쓰던 각종 물통, 식판, 잘 쓰지 않는 접시, 약통 등 갖가지 용기로 점령당한 싱크대 수납장 정리부터 하기로 했다.

플라스틱 반찬통은 왜 그렇게 크기별, 소재별, 모양별로 다양한지 수납장을 열 때마다 가슴이 턱 하니 답답했었다. 시댁과 친정에서 받아온 반찬통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도 모를 색이 바랠 대로 바랜 플라스틱 용기를 그동안 버리지 않고 부둥켜안고 있었다. 버릴 용기, 정리할 용기가 없었다. 나 하나만 모른 척 그대로 안고 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충격적인 사진은 사진첩에 그나마 나은 것들.

몽땅 꺼내놓고 짝이 안 맞고, 오래된 것은 분리수거 통에 넣었다. 언제 쓸지 몰라 씻어둔 채 수납장에 넣었던 소스통, 잼병, 매실청 담갔던 커다란  유리병, 이유식 용기까지 협소해 보였던 싱크대 하부장이 사실은 블랙홀이었다. 끝도 없이 나오는 물건들에 부엌 바닥이 점령당해 버렸다.

자기들 방에서 잘 노는 아이들 덕분에 힘들어도 천천히 분류하고 정리했다.

반찬통부터 시작해서 각종 냄비, 식기, 싱크대 개수대 밑 세제들, 비닐봉지,  종이가방, 일회용품까지 용도별로 정리하니 두세 시간 지나가는 것은 우스웠다.  

 

반찬통을 넣어둘 때, 일회용 비닐봉지 한 장을 넣어둘 때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쑤셔 넣은 후

 

"나중에 하지 뭐. 시간 있을 때 정리하면 돼.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맨날 신경 쓰고 살아."

 

어거지로 합리화하면서 모른 척했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모여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는 정리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두 내가  자초한 것들이다.

반찬통들만 그럴까?

다른 쪽 싱크대 수납장 역시 마찬가지다.

다 못 먹은 과자 봉지, 유통기한 넘겨버린 차 종류, 아이들이 언제 받아왔는지 기억도 안나는 젤리, 사탕류

심지어 그때그때 먹고 버려야 하는데 조금 남았고, 다음에 쓸 수도 있을 것 같아 남겨두었던 약들이 가득하다.

수납장을 열 때마다 확 쏟아질까 봐 조심조심했던 그 조심성으로 차라리 치웠어야 했다.

오전에 시작한 수납장 정리를 오후 늦게서야 마치고, 잘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포스트잇에 각종 수납정리통에 이름을 붙이도록 시켰다.

 

싱크대 정리를 첫날로 시작하고, 신발장 정리, 냉장고 청소, 가계부 정리까지 귀하디 귀한 겨울방학 일주일이 증발해 버렸다. 하지만 수건을 꺼낼 때, 커피를 마실 때, 반찬통을 꺼낼 때마다 숨 막히는 압박감 대신 정돈된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으니 이득이다.

 

몽땅 비우니 10년된 냉장고가 최신형이 되는 마법!
 

미루면 순간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그 부채감 때문에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불안감과 죄책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 한두 번이었던가? 운동도, 공부도, 영어도, 사람과의 관계도 모두 그래왔다.

 

심지어 지금 쓰는 이 글도 거의 삼주 다 되어 가는 시간 동안 써야지, 써야지만 반복하다가 제때 못쓰고 미룰 때까지 미루고 나니 경고장이 날아오지 않았는가. 미루는 시간 내내 못한 숙제를 안고 있는 아이처럼, 받아놓은 시험이 있는데 공부하지 않는 학생처럼 안절부절못하지 않았는가.

 

토요일 오전, 오래간만에 집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는 시간 동안 핸드폰을 놓고 글을 쓰는 지금이 홀가분하다.

공을 들여 멋진 글을 쓰지 않아도 되니,

미루지 말고 그때의 생각과 경험을 글로 남기자던 처음의 마음으로 글을 쓰자.  

주변을 돌아보고, 쓴 물건은 제때 정리하고, 먹은 그릇, 입은 옷들은 제때 설거지, 세탁하며 자고 난 이부자리는 그때그때 치우자.

 

올해 새해 목표는 미루지 않는 것! 버리고 정리하자.

삶이 내게 어떤 것을 주든지 비어 있다면 어려워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고통스럽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

어려운 시작도 시작이다.

그동안 정리를 못했었는데 2024년 결산을 내니 2025년 목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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