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나 혼자 있다

아낌없이 주는 집중력

다시봉봉 2025. 1. 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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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반 휴대폰 문자 알림 소리에 깼다. 몇 신지 궁금한 마음에 일어나서 확인해 보니 딸의 문자다.

 

-엄마 지금 뭐 해? 나 방금 아침 다 먹었어.

-엄마  방금 누워 있다가 일어나려고.

다행이다. 늦게 답장하지 않아서. 나를 빼고 남편, 딸, 아들은 어제 자기들끼리 할머니, 할아버지댁에 놀러 갔다. 지난주 아이들과 일주일 넘게 친정에 다녀온 나를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새해를 맞아 부모님 뵈러 가고 싶은 것인지, 셋이서만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인지, 나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금요일 오후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더니 쏙 집안에서 나가버렸다.

밖은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데 그런 거 잘 모르겠고, 거실에 가득 들어오는 햇살과 미리 빌려놓은 책들을 소파 한편에 켜켜이 쌓아놓으니 월동 준비 마친 곰처럼 푸근했다. 이럴 줄 알고 오전에 청소, 빨래도 모두 끝냈기 때문에 더욱 홀가분했다. 처음엔 도서관에 갈까 싶었다가 차가 없이 걸어가야 하는 게 번거로워 그냥 우리 집이 도서관이다 생각했다. 도서관의 핵심 아이템인 책과, 정적과, 핸드폰(?)도 있는데 마음먹기 달린 것 아니겠는가. 등 따시고 배따시게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누워 책을 보는데 그 핸드폰이 문제다.

 

처음엔 유튜브로 클래식 음악만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임윤찬, 조성진의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듣고 있으니 영혼까지 순결해지는 기분이었다. 노곤노곤해지는 것은 사은품처럼 따라왔다. 잠을 쫓기 위해 듣고 있던 음악을 멈추고, 쇼츠를 눌렀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가 잊어도 되는, 몰라도 되는, 그런데 알면 재밌고 도파민이 분출되는 그런 자극적인 영상들만 계속 띄어준다. 중간에 광고나 이미 본 영상이 있어도 끊기지 않게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영상들은 화수분처럼 나오고 또 나온다. 분명 따뜻한 오후였는데 눈을 돌려보니 어두컴컴해져 있다.

정신 차려야지.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있었는데 일어나려니 몇 시간째 고정되어 있던 어깨와 목, 팔, 허리가 찌뿌드드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걸 못하니 자세가 망가지고, 근육이 경직되어 버린다. 악순환인 것이다.

바닥에 있던 폼롤러를 바로 놓고 목 뒷부분이 가장 결리는 곳을 마사지했다. 좌우로 왔다 갔다!

폼롤러를 세우고 이번에도 왔다 갔다. 팔고 위아래로 돌리면서 이미 유튜브에서 배운 대로 마사지를 했다.

시작한 지 1분이나 됐을까?

이게  맞나?? 잘못했다가 괜히 근육 손상될까 싶어 다시 검색했다.

 

 돋보기를 눌러 폼롤러 어깨 마사지! 수많은 영상이 있지만 짧고 간단한 게 좋으므로 쇼츠를 눌러본다. 내 구미에 맞는 영상을 찾고 보고, 또 찾고. 그러다가 아까 봤던 영상이 또 나오고 유익한 생활 정보, 정치, 자기 계발 영상, 건강한 음식, 자세, 육아법, 독서법 등등 내가 검색했던 수많은 영상들과 관련내용 또 나온다. 반복이다.

 

요즘 내 일상이 이렇다. 깊은 밤이 될 때까지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도둑맞은 집중력 책을 봤을 때 머리를 때리며 나는 유튜브에 정복당하지 않겠어! 다짐했는데

집중력은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내가 유기하고, 방치한 것이다. 자유의지에 의해 도둑에게 내어줬다.

나 스스로 내 집중력을 기부하고 있었다.

국경 없는 의사회도 아니고, 유니세프도 아니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내 집중력과 시간과 에너지와 건강한 신체와 시력, 가족과의 유대, 충분한 수면 시간을 모두 내어주고 있었다.

 

이제 옛날엔 안 그랬는 데를 풀 차례인가.

아이들이 어릴 땐 핸드폰은 음악이나 팟캐스트, 라디오 트는 용도였다. 지금처럼 쇼츠도 없었고 많은 영상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네이버 카페, 다음 블로그가 더욱 재미있었다. 핸드폰 속이지만 활자를 읽고, 사진을 보고, 댓글을 다는 것이 전부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책을 봤다. 공부를 했다. 연수도 듣고, 한자, 영어 등.  

아니면 이어폰을 끼고 동네 한 바퀴를 산책했다. 그것이 나만의 시간 활용법이었는데 운동은 수영으로 대체되고 공부는 아이들하고 있을 때 같이 해버리니까 솔직히 밤이면 자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옆으로 누워 유튜브를 보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그만해! 빨간 경고등이 울리지만

엄지손가락은 아래에서 위로 끊임없이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있을 땐 그래도 자제하려고 한다. 웬만하면 핸드폰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이들마저 집에 없으니 최소한의 방어선도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늦은 밤이 되었고, 따뜻한 햇살이 가득 들어오던 거실은 어두웠고, 야심 차게 꺼낸 책들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다. 오로지 내가 누워있던 자리만 눌려져서 머리카락 몇 올이 흉물스러웠다.

 

더 이상 안 되겠다!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

화면을 흑백으로 전환시켰다.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차마 어플을 삭제하진 못하겠어서 소심한 발악을 해봤다.

 

올해 마흔.

눈에 띄게 늘어나는 흰머리나 푸석푸석한 얼굴은 걱정하면서 생생한 내 뇌는 방치하고 있다.

아무리 겉이 멀쩡해 보여도 나는 급격하게 녹슬고 있다.

기름칠을 해주고 쓸고 닦아줘도 모자라다.

겨우 핸드폰 따위에게 내 집중력을 내어주지 말자!

내 집중력은 내가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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