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나 혼자 있다

성묘

다시봉봉 2025. 2. 3.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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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눈을 쓸어보니

비죽이 나온 가슬가슬한 잔디라도

빼곡해서 다행이었다

 

세상이 모두 하얗게 덮였더라도

계신 곳 한쪽만은 훈훈하길 바랬던 못난 마음이

눈처럼 젖어버렸다

 

작은 컵에 구수하고 달큰했던 커피 한 잔

그리우셨을 것 같아

따라드리고 남은 것을 털어 넣으니

씁쓸하게 넘어가는 맛은

따뜻한 방에서 편하게 먹는 것과 다르다

 

푹푹 쌓인 눈 속에

조용히 잠드신 엄마는

아들말처럼

흙이 되셨는지 바람이 되셨는지

아니면 눈이 되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딸이

쓸어줄때꺼정 거기서 기다리다 녹아 흘러가셨는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곳은 그날의 비가 눈이 되어 흐른 것뿐

여전히 흑백으로 멈춰서 조용하다

 

젖은 눈을 쓸면서

작은 온기나마 전해지길

늘 그리워하는 마음 두고 간다

 


 

유난히 길었던 설 연휴였다. 공항에서 일어난 또 한 번의 항공기 사고 뉴스에 이어 국제공항마다 인파로 가득했다는 상반된 소식에 쓸어내리던 가슴이었다. 시댁부터 들렀다가 친정에 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시댁에서 보내는 시간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밥에, 알아서 설거지까지 척척하는 남편, 아이들과 잘 놀아주시는 시아버님도 계시는데 뭐가 그렇게 불편할까 싶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원래 계획은 설 전날 하루 시댁에서 자고 설날 당일 오후에 친정에 가는 것이었지만 간간이 날리는 눈발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다. 아니나 다를까 친정이 있는 지역은 대설특보가 내려졌고 매시간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올 겨울 눈이 많다 했는데 명절 연휴 기간에 그렇게 눈이 내릴 줄은 몰랐다.

아무튼 전북 장수 적설량이 30센티에 달한다는 소식에도 큰길은 괜찮겠지 했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출처 - https://v.daum.net/v/20250129105947310 KBS 뉴스 기사 중 발췌

 

-야~ 오늘 오지 마라.

-왜? 눈이 그렇게 많아 와요?

-밖에 안나 가봐서 모르겠는데 40센티는 온 거 같어. 큰길도 눈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명절인데 가봐야지.

-안와도 돼! 아무튼 오늘은 오지 말아라.

-알았어요. 알아서 할게.

 

오후에 다시 전화를 드렸을 때도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는 중이라 오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장수에서 한평생 사신 분이라 웬만한 눈엔 이골이 나서 괜찮다고 하시던 분이라 이렇게까지 만류하시는 것을 보니 뉴스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이 온 모양이었다. 별 수 없이 다음날 오전 친정으로 출발하는데 함양 서상부터 산자락에 눈이 보이고, 육십령 터널을 지나자마자 이곳은 한겨울 덕유산 상고대마냥 하얀 눈 세상이었다.

고속도로나 국도도 웬만한 길은 제설이 잘 되어있어서 잘 갔는데 딱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만 눈이 하나도 안 녹아있었다. 그래도 집에 오니 차려주는 밥이 없어도, 핸드폰만 보시는 외할아버지가 애들하고 놀아주시지도 않지만 마음은 편했다.

 

외갓집에 세배드리러 가니 외삼촌들, 외숙모들, 한 십 년 만에 본 사촌동생도 있어서 어색 어색하게 인사도 드렸고, 작은집에 가니 아무도 없이 썰렁해서 돌아오니 우리 집 가기 전에  진짜 할 일은 딱 한 개 남았다.

엄마 성묘였다. 지난 토요일 오전, 장수 겨울치곤 푸근하다고 생각했는데 비까지 보슬보슬 내리고 있어서 쌓였던 눈이 다 녹나했는데 그건 아니도 금세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집에서 엄마 계신 묘까지 10분 거리라 천천히 산책 겸 걸어가는데 아들이 묻는다.

 

-엄마! 외할머니는 땅 속에 계셔? 땅 속에서 뼈만 남아 있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이제 10년이 훌쩍 넘었으니까.

-흙으로 되었을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돌아가신다고 하는 거야. 흙으로 돌아가셔서 자연으로 오셨을 수도 있고, 하늘로 돌아가셔서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실 수도 있고. 아니면 환생하셨을 수도 있고.

-환생하셨으면 우리 같이 어리겠다.

-그래. 우리 아들로 환생하셨을 수도 있으려나?  외할머니는 착하게 사셔서 아마 하늘나라에서 편하게 살고 계실 거야.

 

가슴에 얹히는 말도 이제 자연스럽게 하게 된 만큼 시간이 지났어도, 엄마 혼자 쓸쓸하게 누워있는 묘에 도착하자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서 겨울 부츠를 신은 아이들에게 왔다 갔다 하며 길을 내라고 했다. 약간 오르막길이어서 아들은 재밌는지 성큼성큼 걸어가며 눈길을 다져주었다.

 

남편이 음식을 꺼내놓는 동안 나는 무덤 위 눈을 치웠다. 비에 젖은 눈이라 축축하고 무거워서 잘 쓸어지지 ㅇ않았다. 가져온 우산을 뉘어서 눈을 쓸자 아들은 파드닥 거리며 더 재빠르게 눈을 치웠다. 새하얀 눈 속에 털모자처럼 누런 잔디가 빼곡해서 오히려 따뜻해 보였다.

 

집에 있던 과일 조금, 과자 조금에 술을 가져오려다가 생전에 술 한잔 즐기지 않던 엄마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보온병에 믹스 커피 하나를 타서 가져왔다. 종이컵 딱 한잔 곁에 놓으니 설날 분주하면서도 친척들과 커피 한잔 나누시면서 이야기 나누시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리 잡은 이후 항상 여기 계셨을 엄마를 내 편의에 의해 안 오게 되는 날이 많았다.

눈길 끝에 엄마를 만나러 와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두고 가는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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