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나 혼자 있다

어떤 인생 - 아버지 인생 이야기

다시봉봉 2025. 1. 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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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도 벌써 절반이 지나갔다. 뭘 했나 돌아보려다 지나간 시간만 아까워 차라리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오전에 은행을 가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서둘러 글을 한편 쓰려고 한다.

 

  방학이면 친정에 일주일 정도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 온다. 이번 방학은 다른 때보다 여유가 있었다. 겨울방학 전에 학생들 생활기록부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그렇다.

 

 내 고향 장수는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사이에 길쭉하게 걸쳐 있는 지역으로 지대가 높은 분지 지역으로 눈도 많이 오고 겨울이면 정말 춥다. 거제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이 겨울 동안 눈을 볼 수 있는 때는 외갓집에 갔을 때뿐일 만큼 거제와 극과 극의 날씨인 곳이 장수다. 펄펄 내리는 눈도 많이 보고 새해 시작하는 것도 보면서 뜨끈한 방에서 자기들끼리 잘 노는 아이들 덕분에 나도 편했지만 왠지 아쉬워서 아이들과 안 가봤던 대전과 정읍에 가보기도 했다.

  대전은 아들이 꼭 가보자고 했던 카이스트 대학에도 가보고 내가 가보고 싶었던 성심당, 엄마의 욕심이 묻어있는 국립중앙과학관과 외할아버지가 가보고 싶어 했던 화폐박물관에 갔었다. 장수에서 한 시간 조금 더 가면  이런 도시가 있어 거제에서 오는 것보다 한결 가까워 잘 돌아다녔다.

  성심당에서 사 온 빵을 아침으로 먹고 다음날 간 곳은 정읍이었다. 정읍은 전라북도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전주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정읍사나 내장산 단풍정도밖에 몰랐는데 이번에 5학년을 가르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고 비상계엄으로 이어지면서 시민의 힘이 나라를 뒤엎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게 된 시발점일 수 있는 정읍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역사를 배우지 않았지만 책으로만 보는 역사보다 여전히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에 가보는 것이 언제고 더욱 좋은 배움이니까 또다시 엄마의 욕심이 묻어난 여행지였다.

 

  장수에서 1시간 2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고속도로와 국로도 연결된 도로가 정읍까지 잘 나있어 운전하기 편했다.  일흔이 넘은 우리 아버지는 당신께서 손수 운전연수를 해준 딸이 애 둘을 데리고, 자신까지 태워 운전하는 것이 여전히 믿음직스럽진 않으셨던지 손잡이를 꼭 잡고 시선은 앞으로 고정한 채 앉아 계셨다.

 

정읍으로 가는 길은 장수 - 진안 - 소양 - 삼례 - 전주 - 만경강 금산사 살짝 지나고 김제  -  태인을 거치면 된다. 아무리 직선거리지만 평일에 가는 거라 큰 차가 많았다. 아빠는 이 길을 양배추, 배추 싣고 광주 공판장에 다녀온 후 전주로 돌아올 때 많이 와봤다고 하셨다.

 

-남원에서 광주 갈 때는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데 광주에서 전주 너희 아파트까지 가는 길을 왜 그렇게 멀고, 차도 많이 다니던지 저녁에 운전하고 오려면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나와 동생이 전주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아빠는 자취방으로 반찬이며 과일 등을 자주 가져다주셨고 그 길이 지금 내가 가는 길인 것을 처음 알았다.

 

-아빠는 정읍 가본 적 있어요?

-나? 정읍에서 일 년 정도 살았는데?

-엥? 처음 들었는데? 언제 살았는데요?

 

  아빠는 정읍에 들어서자 정읍 역이 어딘지 두리번거리셨다. 정읍역 근처에 있는 석재공장에서 1년 정도 기술을 배웠다는 것이다.

 

-아빠 예전에 익산에서도 사셨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이리에서 1년 정도 지내다가 기술 가르쳐 주는 분 따라서 정읍으로 왔었지.

 

  올해 아빠는 일흔두 살이시고, 내가 마흔이 되었으니 아빠의 십 대, 이십 대를 금방 떠올리긴 힘들었다. 머리가 희옇게 새었어도, 손주를 넷이나 둔 할아버지라도 청춘이 있었을 텐데 너무 무관심했던 것일까. 겨울바람이 쌩쌩 지나가는 차 안에서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말을 천천히 들었다. 엄마랑 외할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뒷자리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껌을 씹었다가 과자를 까먹었다가, 싸웠다가 난리다.

 

  54년생인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가는 대신 1년 야간중학교를 더 다니셨다는데 공부를 꽤 잘했던 동창이셨던 큰 외삼촌과는 달리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딱 없어진 아버지는 장수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지내셨다고 한다. 그땐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계셨는데 할머니 잔소리도 듣기 싫고,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마침 이리에서 친척 어른 중 한 분이 석재 깎는 일을 하셨는데 그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18살이었다.

 

 

  처음부터 기술을 알려줄 리 만무하고 당연지사 돌 깨는 일부터 해야 했는데, 정말 너무 하기 싫었다고...

큰 망치를 들고 돌을 온몸이 아프게  부셔도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술자 따라 이리저리 공사장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처음 시작은 이리 금마였고, 일 년 후 간 곳은 정읍이었다고 한다.

 

  우연히 가게 된 정읍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살았던 동네를 떠올려보려 정읍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셨지만 그 세월이 얼마인데 50년 전 모습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정읍역은 새로 신축을 했지만 여전히 자리하고 있어서 대강 짐작은 하시는 것 같았다. 쉬는 날이면 그물을 들고 천렵을 하기도 했지만 채 20살이 안된 청년이 생각하기에 돌 깨는 일은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아 정읍에서 장수로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자 당연히 할머니께선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돈도 못 벌어 왔다면서 잔소리를 하셨는지 서울로 가셨다고 했다. 무작정 간 것은 아니고, 또 동네 사람 중 아는 사람이 대한교과서에서 일하시는 분이 계셨기에 찾아갔다고 한다. 소개해준 분은 회사 경비일을 보던 분이었는데 그래도 연줄이 있어서 그런지 기술자도 아니고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교과서나 참고서 제본부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인쇄부에서 인쇄를 해서 보내주면 제본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2-3년 일하면서 보니  이곳도 영 별 볼이 없는 것 같아 고민하던 차에 샤니에서  낸 공고를 보고 입사했다고 한다.

 샤니에서 아빠는 주로 호빵을 만들던 부서에 있었는데 빵 반죽을 하고, 찜기에 넣어 찌는 일을 했었는데 막 찜기에서 나온 호빵이 제일 맛있다고 하셨다. 같은 나이 또래의 직원들이 많아 자주 어울리며 놀기도 하고,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오래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안 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에서 난 공고를 보았는데 대우건설에서 리비아로 건설 인력을 모집하는 공고였다고 한다. 이력서를 한 장 써서 가져가니 다른 시험은 없고 20KG 쌀포대를 이고 달려갔다 오니 합격이었다. 도로 건설 현장에서 조금 있다가 운전면허가 있어서 엠뷸런스 운전을 하게 되었다. 일하던 중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병원에 후송을 하거나, 의무실에 데려다주는 일이었는데 엠뷸런스를 얼마간 운전을 하니, 아빠를 좋게 보는 회사 간부가 있어서 엠뷸런스 운전 대신 세탁소와 매점을 운영하게 되었단다.  

 

 특히 매점을 운영할 때는 물건을 떼어 와서 회사 안에서 파는 일로 , 나중에 정산을 할 때 손실이 있으면 메꾸어야 하는 일이 발생할 때가 많아 수익금을 조금씩 모아두었는데 이것이 부수입이 될 때가 있어 좋았다고 하셨다. 단순히 생각하더라도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모래 바람 속에서 일하는 것보다 편하기는 할 것 같다. 그때 일이 있으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빠는 각종 모임에서 총무를 도맡아 하셨는데, 기록하고 정산한 것 보면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어 배울 점이 많다.

 

  리비아에 간 때가 27살이었는데, 3년 정도 일하니 어느 정도 돈을 벌었지만 재미도 없고, 무엇보다 고향에 가보고 싶어서 한국에 잠깐 나오게 된다. 40일만 체류를 하고 다시 회사에 무조건 돌아가야 하는 조건이었는데, 이때 엄마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니 40일 만에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쓰기로 한다.

 

  결국 돌고 돌아 결혼 후 다시 장수로 돌아온 아버지는 그때부턴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 그런데 벼농사가 아닌 다른 농사를 시작하셨는데 오이 같은 채소 농사를 비닐하우스(연동)에서 하는 것이었고, 혼자가 아니라 작목반을 꾸려 동네 비슷한 연배의 젊은 농부들과 같이 하셨다.  그렇게 시작한 오이 농사는 30-40년이 넘게 하고 계신다. 벼농사가 대부분이던 그 시절 농사에서 벗어나 오이 농사를 시작할 때 주변 사람들이 엄청 걱정 아닌 걱정을 하셨다고.

 

-다 미쳤다고 했어. 금방 망할 거라고. 근데 봐라. 지금 노곡리에서만 오이 농사짓는 게 아니라 장수에서 안 하는 데가 없다. 시작할 때 품이 많이 들고 기술도 들어가니까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이게 경쟁이 되어서 새벽에 헤드랜턴 끼고 오이 따는 사람도 생기고, 난리였지.

 

그렇게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읍에 도착하고 아이들과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평생 기억하며 산다는데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만 있을까? 내 인생을 둘러봤을 때 그렇다 할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 그냥저냥 공부해서 남들 다가는 직장에 가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시간들이 지나 40이 되었다. 특별히 빛나는 때도 어두운 때도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았던 내가 지금처럼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너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일흔이 넘으셨지만 그 세월 안에 정말 다양한 순간과 경험을 겪으셨기 때문에 나보다 더 큰 지혜와 시야를 갖고 계신다. 이제서야 새로운 위험을 겪어 지혜를 얻고자 함은 아니지만 가까운 곁에 아버지를 두고서 그저 그럴듯한 롤모델을 찾았던 걸까.

파랑새를 찾아 집을 떠났던 아이처럼 빙빙 둘러 겨우 찾은 곳이 집인 것만 같았다.

 

 

돌고 돌아 어떤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내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아버지께서는 외가 친척 어른들과 대마도 여행을 간다고 하셨는데 배가 고장이 나서 여행이 취소되고 부산에서 논다고 하셨는데 잘 지내고 있으신지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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