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나 혼자 있다 18

또다시 순천

또다시 남자와 여자에 관한 보통의 연애 이야기로 시작하자. 만난 지는 몇 번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 못한 채 주말이 되었다. 서로 바빠서 얼굴만 두어 번 보고 연락만 주고받는 요즘 말로 썸을 타던 시기였다. 토요일 오후 남자는 여자가 퇴근하기를 기다렸고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어디를 갈 거냐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편다. 그날 갈 곳과 여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데이트를 한 곳은 순천이었다. 사람이 많았고 이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고 하늘이 높고 파랬다. 순천으로 향하던 차 안의 공기가 선명했고 시간은 더디 흘렀다. 이야기는 조잘조잘 끊어지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먹했던 것은 아직 사이가 분명하지 않아서였을까 여자가 물었다. ..

다시 그리고 같이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1월 중순 왼발 세번째 발가락이 부러진 이후 회복되는데 두달이나 걸려서 강제로 쉬었고 그 이후 3-4월은 바쁘다고 쉬었다. 좀 바쁜 시기가 지나가서 등록하려고 가니 수영장 보수 공사라고 다시 쉬었다. 주말에 집에서 좀더 먼 다른 수영장에 가기도 했지만 꾸준하진 못했다. 역시 나란 사람에게 운동은 강습비를 내야 할 수 있는 거였나. 벼르고 별렀다가 공사가 끝다기에 저번주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 5시반 수영 강습, 이전에 다니던 시간으로 등록했다. 다시 들어간 수영장은 똑같아 보였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같이 초급반 강습을 받던 몇 분들은 이제 중급반으로 올라가 있었다. 얼굴이 익숙한 다른 회원들은 그간 실력이 많이 향상되어서 연습 앞줄 선두에 서 계셨다. 처음 보는 모르는..

젊은 나에게

금요일 오후였다. 일찍 나갔다가 아들을 데리러 다시 들어오느니 수업 준비를 하는 것이 났겠다 싶어 교실에 있었다. 다음 주에 있을 공개수업 자료를 미리 인쇄해서 코팅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 학년 연구실에는 코팅기가 없어 6학년 연구실에 들어갔다. 겉으로 봤을 때 아무도 없어 보여 연구실 옆반 6학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연구실에 들어갔는데 6학년 선생님이 아이들과 간식을 드시고 계셨다. -아이고!! 선생님 죄송해요. 아무도 안 계신 줄 알고. 옆 반 김**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들어왔어요. 코팅기 좀 써도 될까요? -예. 물론이죠. 같이 드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금방 하고 나갈게요. 괜히 아무도 없는 남의 집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머쓱해져서 코팅기를 틀고 빨리 예열되기를 기다렸다. 코팅할 거리가 꽤 되..

다정한 말 한 마디가 백송이의 꽃보다 아름답다.

가정의 달? 다정의 달! 다정한 말 한마디가 백송이의 꽃보다 아름답다. 5월은 일년 중 가장 꽃을 많이 보는 달이다. 아름다운 장미가 피기 시작하고 철쭉, 영산홍이 끝물이긴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화사한 계절이다. 이런 꽃들도 아름답지만 내가 말하는 꽃은 카네이션이다. 지난 한 주 동안 내가 만들고, 보고, 받고, 산 카네이션이 몇 송이인지 헤아려본다.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 만들어 드린 카네이션 카드 시부모님, 친정 아버지에게 드리는 카네이션이 가득 들어간 생화 액자. 우리 반 아이들과 같이 만든 어버이날 기념 카네이션 꽃바구니. 우리 반 아이들이 부모님께 쓴 카네이션이 가득 들어간 편지. 우리 아들이 유치원에서 꽃꽂이하여 가져온 카네이션 생화 꽃바구니 우리 딸이 미술학원에서 ..

선생님도 힘들다

월요일이 재량휴업일이라 주말을 끼고 친정에 다녀왔다. 일요일 월요일 날씨가 정말 좋아서 아버지와 아이들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녀왔다. 친정에서 집으로 내려가는 길. 아이들은 뒷자리에서 자고 있고 나는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이석훈의 브런치 카페라는 MBC FM포유에서 11시에 하는 라디오다. 좋은 노래가 많이 나와서 장수에서 거제까지 오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중간고사가 끝나서 홀가분하다는 어떤 학원 선생님의 사연이 소개되고 사연 끝에 디제이가 말했다. "학생 때 선생님들 보면 참 신기했어요. 수업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선생님들은 조금 더 수업하려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들은 하나도 안 힘든 줄 알았어요." 맞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빨리 일어나고 싶어 부릉부릉 ..

느낌을 살려 말해요

월요일 1교시는 국어, 3단원 느낌을 살려 말해요 마지막 시간이었다. 상황에 따라 말투와 표정, 몸짓을 다르게 해야 하고 듣는 사람, 읽는 사람의 연령대, 관심사에 따라 말하고 쓰는 내용을 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단원이다. 딱히 재미있는 단원은 아니라서 여러 차례 글을 읽고, 그 글을 요약하고 듣는 대상에 따라 발표하는 연습을 몇 번하니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시간 학습 목표는 자신의 경험을 실감 나게 말하는 것이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보물상자를 쓴다. 보물상자는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고 보물처럼 상자에 담아둔다는 뜻으로 그냥 일기다. 주제를 주말에 있었던 일로 하고 그 일을 실감나게 말하는 연습을 하면 수업 내용으로 알맞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면서 주말에 있었던 일을 하나씩 말했다. -가족들과 스즈..

상자 안에 담은 봄

출근 준비하고 있는데 시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바쁘나? -예. 이제 출근하려구요. -오늘 택배 갈껀데 파김치 들어있다. 경비실에 맡기라고 할까? -아니요. 저희 동네 택배 늘 오후에 도착해서 퇴근하고 바로 정리하면 될거예요. -그래. 아침에 바쁠텐데 출근해라. -예. 어머님! 오후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니 문 앞에 과일 상자 하나가 있었다. 낑낑 거리면서 상자를 옮기고 열어보니 15키로 짜리 택배 상자가 화수분이다. 꺼내도 꺼내도 뭐가 계속 나온다. 파김치 담은 커다란 비닐 봉투부터 달래, 시금치, 대파, 참외 대여섯알. 쌈배추까지 켜켜이 참 알뜰하게도 담으셨다. 파김치는 김치통에 옮겨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거두고 채소들은 한번에 먹을만큼 나눠서 비닐팩에 넣었다. 한동안 채소 걱정..

빨래

빨래를 갠다. 건조기에서 꺼낸 지 언젠지 이미 눅눅해진 빨래를 갠다. 수건, 속옷, 내복이 뒤섞여있다. 구깃구깃한 빨래를 보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가 던져버렸다가 다시 본다. 아이들 내복을 들어 반듯하게 갠다. 내일 씻을 때 기분 좋게 입으라고 반듯하게 펴서 갠다. 남편 빨래가 섞여 있다. 던져버렸다. 다시 애들 옷이다. 보들한 옷을 쓸어만 진다. 많이 입어 닳은 메리야스지만 딸냄새, 아들냄새 기분이 좋다. 다시 남편 빨래다. 있는 힘껏 던지기도 아까워 툭 내려놓는다. 구겨져있는 빨래를 한참동안 그 자리에 있게 해서 미안한 빨래를 늦은 밤에 갠다.

슬기로운 취미 생활

나의 취미는 악기 연주다. 엄청 우아해 보인다. 집에 있는 악기를 말하자면 일단 산지 7년 된 야마하 전자 피아노 1대 10년 된 오만 원짜리 우쿨렐레 하나 남편이 청혼할 때 연주하겠다고 나 몰래 산 통기타 하나 딸이 목재 체험장에서 만든 칼림바 하나, 그전에 예뻐서 산 아크릴 칼림바 하나. 리코더 두 개. 그리고 오늘 내가 만든 칼림바 하나 더 추가했다. 요즘 연주하는 악기는 피아노, 우쿨렐레, 칼림바다. 초등학교 때 유일하게 받은 사교육이 피아노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데려갔던 에인절 피아노 학원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주말 빼고 매일 갔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 언니, 내 동생까지 같이 다녔다. 여름 방학, 겨울 방학 방학에도 쉬지 않고 정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맨날 다녔다. 5년..

커피 한 잔

커피를 좋아한다. 정확히 맥심 모카골드 믹스커피를 뜨겁게 타 먹는 것을 좋아한다.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먹는 커피 맛은 잘 모르겠고 한잔을 다 먹기도 힘들다. 나중에 알았는데 나는 카페인에 민감하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그날 밤 잠은 다 잔 거다. 그래서 나만의 커피 음용법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믹스 한잔. 퇴근하고 와서 다시 또 한잔. 이렇게 두 잔이면 충분했다. 따뜻하고 달다. 가볍지만 텁텁하다. 다 마시면 아쉽지만 더 먹긴 쓰리다. 예전엔 종이컵에 마셨는데 요즘은 컵에 타서 마신다. 손이 따뜻해져서 좋다. 식은 커피는 별로다. 차가운 내 손을 덥혀주면 노곤노곤해져서 좋다. 누군가 말하기를 믹스 커피 한잔을 마시면 평생 배출이 안된다고 한다. 건강에 안 좋아서 믹스커피 마시는 사람 별로 없지 ..